열림
축축했던 대기의 기운이 다하고, 날숨이 서서히 보일 시점에는 생명의 교환도 차츰 둔해진다. 풀잎은 메마르고 잎사귀는 하나둘 떨어진다. 차가운 공기에 응답하는 금속현처럼 몸은 움츠러든다. 맥박이 조금 드물어지기 시작할 때에 도착했다. 산줄기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귀를 열자, 누구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 곳에서 소리가 먼저 찾아온다. 자동차의 요란한 엔진음과 인간의 발걸음이, 그 아래에는 조그만 흔들림에 낙엽이 지저귀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린다. 고요함 사이로 나를 찾아오는, 이제는 잘 들리지 않는 먼 곳의 소리들.
심이다은의 《보편타당한 숲》(이하 《숲》)은 백두대간의 능선에서 진행된 연구와 사전 프로그램, 전시-퍼포먼스, 그리고 웹사이트로 구성된다. 각각의 작업은 서로 맞물려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첫째로 기록과 수집의 반복으로 응축되는 현장 조사는 작업에 참여하는 모두를 감싸고 관객을 숲의 울림으로 구현된다. 다음으로 사전 프로그램은 전시-퍼포먼스의 상연 내내 참여자를 이끄는 틀을 주조한다. 그리고 이동식 구조로 조직된 전시-퍼포먼스는 《숲》의 맥락을 정태적이거나 경직된 의미로 수용하지 않게 하기 위해 작업 영역 전반을 활성화한다. 마지막으로 심이다은의 웹사이트는 방문자에게 사라져 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고, 발자국이나 먹이 흔적처럼 소리의 중요성을 환기한다. 2023년부터 이루어진 작업의 연장선에서, 《숲》은 멸종위기종의 생존을,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활동 및 거주 영역)을 분할하는 '보편타당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실내 공간에서 관객을 객석에서 고정시키는 이전의 작업과는 대조적으로, 마련된 객석이 없기에 관객은 《숲》이 진행되는 동안 야외에 머물러야 한다. 외부에 한없이 노출된 채.
1.
어둠이 내려앉기 전, 산은 온통 황록색으로 뒤덮인다. 발밑이 귀가 될 정도로 잠잠히 걷는다. 땅의 질감, 돌부리의 투박함과 나무껍질의 주름은 몸의 움직임을 이리저리 조향한다. 우리가 걷는 바깥은 흔히 특정한 목적을 위해 움직이며 거치는 막간이다. 내부와 내부 사이에 존재하는 사이-공간으로서, 외부는 매개와 이행의 공간으로 작용한다. 외부는 내부에 침투해 변화를 일으키고, 안과 밖은 알아볼 수 없게 뒤바뀐다(Gros, 2009/2014).
《숲》의 전시-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공원 일대는 서로 다른 역사와 풍경이 중첩되는 허구의 무대가 된다. 작업의 후경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과거 인간이 구름처럼 모여 살던 언덕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시사하는 마주침의 공간으로 재구성된다.
심이다은의 무대는 관객이 부단히 이동하길 요청한다. 어떤 방향으로 무대에 진입하든, 관객은 이동하는 과정에서 산의 수호신과 만난다. 각각의 수호신은 심이다은이 울림을 기록한 현장에서 숨쉬고 울고 살아가는 야생의 존재들이다. 이들은 거리를 두고 경계하지만, 관람자를 위협하거나 등을 돌려 도망치지 않는다. 수호신은 자신에게 몸을 맡긴 자들을 마중하고 안내하며, 도래할 무대를 개방한다. 관객은 수호신의 제안에 따라 산에 누워 땅의 울림을 느끼고, 동물의 흔적을 따라 걷고, 바람의 속도를 감각한다.
수호신은 방문자에게 자신의 장소를 허락하고, 신체적 행동을 지시한다. 그러나 관객과 수호자, 지시문, 그리고 그 밖의 많은 행위자가 참여하는 이 장면의 지속에는 명확한 끝맺음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수호신이 어떠한 말도 없이 다만 관람자를 응시할 뿐이기에, 《숲》의 시간은 퍼포먼스 너머로 계속 연장된다. 시간의 축이 바깥으로 열린다. 한편, 이미 무대 위에 있는 수호신의 응시는 관객의 자리에 의문을 제기한다. 지시문이 겨냥하는 행위자는 누구인가? 극장의 밖, 장과 막의 이동도, 암전도 없이 전환하는 무대 위에 등장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아닌가?
무대에서 벌어지는 자리바꿈은 관객의 위치, 즉 관객을 비롯한 여러 관계들의 배치라는 문제를 고려하게 한다. 왜냐하면 관람자는 의미가 이동하는 무대 안에서 자신이 바라보는 것의 응시 대상이 되는 것으로만 자신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자리는 매 순간 다른 방식으로 열리고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Nancy & Lacoue-Labarthe, 2013). 《숲》은 무대 구조를 바탕으로 인간의 위치를 문제삼는다. 이는 주체성의 한계 너머에 대한 질문으로, 즉 관객의 위치를 초과하는 바깥에 대한 질문으로 관객을 견인한다. 마주침과 사건의 장소로서, 심이다은의 무대는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타자, '인간성'의 위상과 한계를 부정적으로 구축하는 동물의 문제에 관람객을 연루시킨다.
《숲》은 인간-동물 간의 관계를 아름답고 평화롭게 묘사하는 순진한 작업과 구별된다. 예술 장 내에서 동물에 대한 성찰이 담긴 수많은 작업이 제출되었지만, 대부분의 작업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에 도전하지 않거나, 문제를 인격화하거나, 비슷한 논의를 답습하며 더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 그런 탓에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표면적으로 다룬 대다수의 작업은 자본주의적 전유 전략과 간격을 두지 못하거나 심지어 친밀성을 띠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의 특권적 위치와 자의적인 서열화가 어떠한 물질적/상상적 효과를 만드는지 간과하는 한,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인간의 '권리'가 동물의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고 생산하는 권력 관계를 어떻게 확립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없는 한, 윤리는 자본주의적 폭력에서 나타나는 마찰음을 줄이기 위해 동원되는 책략으로 전락할 수 있다.
반면 《숲》은 인간이 동물에게 가하는 다양한 폭력을 퍼포먼스의 배경으로 끌어들인다. 심이다은의 작업은 자기 삶을 보존하고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땅의 점유자와 인간이 맺는 갈등적 관계를 무대화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폭력적인 관계라는 문제 설정은 수호신이 취하는 산양, 붉은여우, 반달가슴곰의 형상에서 더욱 확연해진다. 그렇지만 《숲》에서 동물은 무력한 희생양이기보다 협상과 질문의 주체로서 출연한다. 수호신은 우리가 공기처럼 흡입하며 동물에게 수행하는 상호주관적·제도적·인식론적 폭력을 거치고 대면하게 한다.
생명/삶을 생산하는 권력은 죽음을 생산하는 권력과 짝을 이루며 움직인다. 이것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대량 학살을 저지르는 상황마다 재발하는 역설이지만, 심이다은의 작업에서는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영역을 나누는 실제적 경계와 물질적 구조를 갖추고 그러한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자기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동물 질병의 유입을 방지하고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이 펼친 3메가미터의 철책은 인간이 수행하는 일종의 자가 면역 활동이다. 이러한 구조물은 생태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며, 인간의 편리를 위해 개설된 도로나 '친환경'의 이름으로 설치되는 인공 시설물과 마찬가지로 동물의 활동을 제약하고 고립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다.
동물의 지위를 박탈하고 통제하고 처리하는 일련의 프로세스에서, 모든 것은 인간의 효용과 유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전개된다. 그러나 인간의 영역과 동물의 영역 사이 엄밀한 경계선을 긋기란 불가능하다. 인간의 영역을 안전하게 만들고, 생산의 효율과 안정성을 늘리기 위해 동물의 영역과 번성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일은 역사를 초월한 보편적 진리라고 할 수 없다. 탈취와 몰아냄, 상징적 강등, 인식론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자연적'이지 않다. 이것은 한 사회의 역사 및 문화적 차원과 불가분한 담론 및 권력 관계와 깊은 연관을 가진다. 특히 다른 형태의 폭력과 연동되는 인식론적 폭력은 권리를 박탈당한 무수한 생명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폭력이라고 지각할 수 있게 만들고 그것을 어떻게 인식할지 정의한다. 디네시 와디웰이 언급하듯, 우리가 동물에 대한 폭력을 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폭력이며 동물이 폭력의 진정한 희생자라고 상상하거나 사고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인간의 자유는 동물의 지속적인 부자유에 의존하며, 인간의 자유는 제도적·인식론적 폭력을 통해 합법화된다(Wadiwel, 2015/2025). 《숲》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비대칭적이고 불균등한 관계를 맹목적으로 평탄화하는 시도에 따르지 않는다. 심이다은의 작업은 인간의 활동 영역을 안전화하거나 복수의 폭력을 자연화하는 요소 및 관계를 인지하게 한다. 이것이 세계와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내포하는 것이라면, 심이다은이 특정한 서식지에서만 동물이 살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것은 관객에게 다르게 감각하고 상상하길 권하는 것이다. 이는 박탈에 직면해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저항하는 행위, 즉 새로운 무대를 여는 것이다. 동일한 말이지만, 이것은 확고한 상태로 여겨지는 인간적 배열에 대해 질문하고, 사고 및 행위 양식의 변화를 촉구함으로써 지배 담론이 구성한 위계와 배치, 상상의 방식을 전도하는 것이다.
2.
산등성이에서 진행된 퍼포먼스가 막을 내린 후, 세 수호신은 자신의 장소에서 잠깐 벗어나 미지의 《숲》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작은 함에 담겨 우리의 귓바퀴를 어른거리던 미세한 소리는 차이 속에서 공명한다. 지리산-소백산–설악산의 소리와 흔적은 한 장소에 모이지만 동일한 음색이나 선율로 수렴하지 않는다. 이질적인 소리들이 충돌하고 뒤섞이면서 '보편타당한 숲'의 형태는 새롭게 파생된다.
다른 리듬과 시간성을 가진 숲의 소리가 뒤얽히면서 전시-퍼포먼스의 맥락은 퍼포먼스가 상연된 장소의 차원을 넘어선다.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장소의 소리는 가장 가까운 공간에서 울려 퍼진다. 귀를 관통해 관객의 신체 속에서 울림을 반복하며 소리는 새로운 의미를 구성한다. 심이다은이 채집한 소리는 무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장 뤽 낭시의 말을 빌리자면, 소리는 시각적인 것이 공유하는 미메시스적 경향과는 다른 특성을, 즉 참여와 공유, 전염과 연관되는 메텍시스적(methexic) 경향을 갖는다. 소리는 공간을 통해 퍼져 나가며, 자기 자신의 공명과 반향을 퍼뜨리는 공간을 개방한다. 소리는 확장되거나 지연되고 연장되며 본질적으로 도래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낭시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듣기란 주어진 상황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는 것, 현재 접근할 수 없는 가능한 의미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라 말한다(Nancy, 2007). 심이다은의 구조물은 무대와 함께, 또는 무대와 난란히 도래할 세계를 만드는 실천이다. 《숲》의 구조물이 형성하는 혼성의 세계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 여기서 소리는 서로 부딪히며 현실의 의미 체계에 대항하고, 불균형 속에서 저항의 가능성을 여는 데에 기여한다. 물론 지배적 질서를 바꾸는 작업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습성과 기질, 즉 사회적 궤적에 따라서 사물을 파악하기 때문에, 존재 양식을 순식간에 바꿀 수 있다는 말은 오류에 불과할 것이다. 소리는 우리의 틈새로 들어와 울리고, 확산하고 반향하면서 이 세계를 다시 이해하는 것을 촉진한다. 듣기를 통해 우리는 다양한 방향으로 계속 열리며, 새로운 자기(self)를 형성한다.
그러나 여기서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이 연관을 가진다고 해도 사운드스케이프 개념에 의거해 심이다은의 작업을 해독하는 것은 다소 불충분하다. 팀 잉골드의 말처럼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어떠한 경로를 취하든 동일한 세계이지, 특정한 감각 경로의 선을 따라 분할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운드스케이프는 풍경/경관(landscape)이라는 시각적 개념에 준거하여 소리를 잘못 받아들이거나 왜곡시킬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소리는 인지의 대상이 아니라, 소리는 대기나 빛과 같은 지각의 매질(medium)이고, 인지의 근본적인 조건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휘감고 있는 소리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외부에 노출되어 있는 한, 지각을 위한 본질적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가 복수의 흐름이 구겨지고 접히며 영원히 발생하는 유동적 세계를 공동으로 조직할 때, 듣기는 세계와 우리가 서로 점유하는 관계라는 점을 계속 환기시킨다(Ingold, 2007). 심이다은의 소리는 관객이 잉골드가 언급하는 '대기적' 사건에 휘말리게 만든다. 대기적 사건 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우리의 실존을 뒤흔들고 정서와 환경(milieu)의 변화를 유발한다. 한 장소에 모인 생명의 소리를 듣는 것은 우리가 연루된 복잡성을 인식하는 것이자, 다른 체계를 취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곧 자기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듣기를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 역시 이해하고 변화시킬수 있게 된다(Ingold, 2022). 하지만 이러한 듣기는 무향실이나 폐쇄적인 스튜디오처럼 안정된 공간에서 진행되지 않는다. 오히려 듣기는 항상 현행의 권력 구조 및 배치와의 연관 속에서 이루어진다. 간극과 단절, 중단으로 가득한 말에 귀를 기울이고 들리(지 않)는 무의미한 간격에서 의미를 찾아 연결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인내심과 호기심, 그리고 망설임이 필요하다(Stathopoulos, 2022).
필드 레코딩을 사용하는 일반적인 접근법은 명료한 듣기를 위해 간섭 없는 환경을 조성하고, 모든 망설임을 제거하기 위해 분투한다. 심이다은의 실험적 작업이 취하는 열린 체계는 이런 접근에 맞서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흠집 없는 공간을 빗나간다. 또한 《숲》은 필드 레코딩의 소리를 분절하거나 다양한 영역의 차이를 추상화하여 엔벨로프의 수치로 환원시키는 기술적 레퍼토리와도 결별한다. 심이다은의 작품은 돌아가야 할 원형의 자연으로 회귀하거나 현실 속의 분쟁을 제거하며 실제적인 폭력과 갈등의 역사를 무시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심이다은의 작업은 '보편타당함' 자체가 마찰과 갈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전제한다. 관객을 비롯한 모든 행위자의 소리와 흔적이 누적되면서, 그리고 기록된 소리와 현장의 소리가 겹쳐지면서 환경은 변화한다. 듣기의 조건은 끝없이 갈라진다. 밖을 향해 열린 무대 위로 교차하는 관계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소리는 다양하게 울려 퍼진다. 마치 주체의 위치가 계속 열리고 변화하는 것처럼, 뼈의 공동을 울리는 《숲》의 소리는 시시각각 변화한다. 그렇기에 《숲》을 관류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항상 실패할 위험에 개방되어 있다. 더 정확히는 연구의 조건과 연구의 실천, 작업 제작 사이의 시차로 인해 실패는 이미 심이다은의 작업 속에 내장되어 있다. 그러나 듣기가 관계적 역량에 기반하여 들리지 않거나 무시당하는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라면, 듣기의 실패는 부정적인 경험이 아니다. 반대로 실패는 이해가 끊임없는 질문과 재협상의 과정이란 점을 알려 준다. 듣기에 실패할 때,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하려는 시도가 좌초될 때, 우리는 세계를 다시 이해할 기회를 얻는다. 따라서 듣기에 실패하는 것은 완전한 좌절이 아니라 다르게 들을 수 있음을 뜻한다. 실패는 현행의 존재 방식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유도하는 비판적 행위의 한 양태이다(Bureau for listening, 2025).
따라서 심이다은의 작업은 현행 사회 속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조장하고 틀짓는 보편타당성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이다. 전시와 퍼포먼스는 여려지는 소리 속에서 대항품행을 상상하고 창조하도록 관객의 신체를 열어젖힌다. 인간의 지배적인 위상과 위계적 관계에 대한 물음은 관객의 자리를 재배치함으로써 시작되지만, 전시-퍼포먼스가 끝난 이후 끊임없이 도래하는 소리의 형태로 잔류한다. 관객의 내면에 남아 울리는 소리는 인간이 동물에게 저지르는 폭력, 특히 폭력의 상징적·인식론적 차원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심이다은이 전하는 울림은 당분간,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피드백 속에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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